티스토리 뷰
한때 나는 사진을 열심히 찍었다. '폰카'는커녕 '디카'라는 단어가 탄생하기도 전이니까 좀 아득한 시절의 추억 되겠다. '좀'이라는 부사가 머쓱하다. 그리고 '찍었다'는 동사는 어색하다. 돌이켜 보면 그때 나는 실제 사진 촬영보다는 촬영에 수반하는 작업에 훨씬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았다. 그때 내 사진은 현장에서 만들어졌다기보다는 암실에서 만들어졌다고 하는 편이 적합해 보인다. 그래서 내세울 만한 결과물을 남기지 못했나 싶기도 하다.
사진이 값비싼 취미인 줄 미처 모르고 빠져들었던 여느 학생들처럼 나는 필름 준비부터 사진 끼울 종이액자를 만드는 것까지 수많은 절차를 직접 겪어내야 했다: 밥 한 끼 값이던 흑백필름 코닥 T-max를 매거진 단위로 사 쓰는 대신, 사진소모임 친구들과 돈을 모아 종로나 남대문에서 100ft짜리 벌크 롤을 산다. 그것을 각종 도구와 함께 소위 암백에 집어넣고는 릴에 끼워넣고 빈 매거진에 필름을 감아넣는다. 카메라 장전은 저렴하게 했더라도 셔터는 고민 끝에 누른다. 일주일치의 고민이 담긴 36컷 필름을 다시 암백에 넣는 것으로 현상 과정은 시작된다. 암백 안에서 매거진을 뜯고 필름을 꺼내 지문 묻지 않게 스틸릴에 감아넣은 다음 다시 현상탱크에 넣는다. 현상 과정은 차마 적을 엄두가 안 날 만큼 복잡하다.. 아무튼 물과 온도계와 고약한 냄새의 현상액과 한 시간쯤 씨름하고 나면 잠상이 역상으로 맺힌 암호문 띠지 같은 필름이 나온다. 이쯤 오면 기대감과 흥분감에 마음이 바빠진다. 다만, 물에 젖은 필름이 건조되기를 한나절 기다린 다음, 밀착인화를 뜨고 또 확대인화하는 암실 작업은 또 길고 길다. 뭐 비싼 일포드가 아니라 일리드 인화지에라도 남겨 볼 만한 컷이 있다면. 기대가 컸지만 인화로 살리기 힘들 만큼 노출이 엉망인 컷도 많다. 셔터스피드와 조리개값을 메모한 촬영수첩을 뒤져가며 곧 쓸모 없어질 교훈을 얻기도 한다.
이런 작업을 2년 내내 재밌어라 반복했다. 그땐 그랬다. 그때 사진소모임 친구들과 찍고 나눴던 별 것 없는 사진이 우리에게 그토록 가치와 기쁨을 주었던 원천은 어쩌면 바로 그 어마어마한 수작업 과정이 아닐까, 언뜻 그런 생각도 든다.
맛본 지 몇 달 안 되었지만 데이터 시각화는 여러 모로 사진과 닮았다고 느낀다. 다량의 데이터를 수집해 가공하고 시각화하는 작업에 몰두할수록, 사진 작업하던 때의 내가 자꾸 소환된다. 다만 조금은 다른 감성으로. 몇 시간째 디버그되지 않는 코드와 씨름하다 보면 애초의 목적과 열망에 집중하기 어려워지고, 동 트는 새벽을 바라보며 의심을 품는 경우도 생긴다. 엉킨 데이터 속 잠상이 과연 내가 기대하는 모습, 내 정신을 이만큼 고갈시킬 만한 모습으로 나타나 줄지.. 계획한 모든 과정을 끝내기 전까지 데이터는 역상을 보여주는 경우조차 드물다. 그렇다고 한참 담그고 있던 손을 빼낼 수도 없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시간의 끝에 모습을 드러낸 결과물은 나를 번쩍하는 희열에 휩싸이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주의를 환기하고 다시 보면 "그래서?"라는 차가운 물음표가 돋아나는 것도 피할 수 없다. 문득 자리에서 일어나 조명을 환히 켜 보지만 구경하러 들어오는 친구는 없다.
이제 나는 사진 찍기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사진을 향한 강렬했던 내 감정은 어떻게 된 것이며 또 왜 그렇게 되었을까. 사진을 찍고 공유하는 일이 먼지 털기만큼 간단해졌기 때문일까. 그 시절의 성스러운 노동이 부정당하는 느낌 때문에? 첫번째 문단을 쓸 즈음에는 그렇게도 여겼지만, 마지막 문단 이 행까지 와서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그건 바로 소모임 친구들이 다 결혼해버렸기 때문인 것 같다. 암실 밖에 아무도 없기 때문인 것 같다.
내 암실의 문을 열고 결과물을 걸고 사람들을 불러들여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이유는 대략 이렇다.
—
'visualization'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울의 도로교통 패턴 #5: 서울로7017 (0) | 2018.01.03 |
---|---|
서울의 도로교통 패턴 #4 (0) | 2017.12.12 |
서울의 도로교통 패턴 #3 (0) | 2017.12.08 |
서울의 도로교통 패턴 #2 (0) | 2017.12.03 |
서울의 도로교통 패턴 #1 (0) | 2017.12.02 |
- Total
- Today
-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