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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an mobility

지구의 주인-1

glasvase 2017. 4. 3. 20:30

… [F]ast transportation systems turn urbanized people for 17% of their waking hours into passengers, and for an equal amount of time into members of the road gang that works to pay Ford, Esso, and the highway department.

… 고속 교통체계 속에서 도시 사람들은 깨어 있는 시간의 17퍼센트 동안 승객으로 살며, 또 그만큼의 시간을 포드사와 액슨 오일, 고속도로 관리국에 돈을 갖다 바치는 도로 보수반의 일원으로 산다.

— Ivan Illich (1977) “Disabling Professions,” p.28


“지구의 주인은 누구인가?” 언뜻 당연하거나 유치해 보이지만 의외로 과학자들이 좋아하는 질문이다. 어떻게 보면 대다수의 과학자들은 이런 류의 우문에 사로잡혀 연구 경력을 시작한 사람들이다. 아무튼 이 질문은 특히 생물학자들이 자신의 연구대상이 가지는 존재론적 의의를 강조하고 싶을 때 화두로 동원되고는 한다.

그래서 지구의 주인은 누구인가? 이를테면 끝까지 살아남는 자가 강자라고 할 때, 쥐나 바퀴벌레의 놀라운 생존·번식 능력은 인간이 멸종한 이후 세상의 주인 자격을 예고하는 듯하다. 어쩌면 우리는 작은 존재가 가진 주인된 힘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구상 모든 개미의 몸무게를 합하면 인류 전체의 몸무게보다 무거울 거라며 개미의 ‘중함’을 피력하는 개미 연구자들은 계산법을 두고 다소 논란에 휩싸인 것 같지만, 미생물학자들의 박테리아에 대한 경외심 가득한 이야기를 듣다 보면 애초에 지구의 주인은 박테리아 가운데 있는 것도 같다.


대체로 자연과학자들보다 때가 묻은 것처럼 보이는 사회과학자들이 이런 질문을 화두로 삼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적어도 체제와 권력관계를 다루는 사회과학 연구들은 결국 그 정점 또는 근간에 무엇이 있는지를 의식하거나 의심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이 질문을 염두에 두고 있는 셈이다. 그들에게 이런 이야기는 각 연구자 관심사에 따라 가령 미국이냐 중국이냐, 또는 군사력이냐 금융권력이냐 문화권력이냐를 놓고 암시적으로 전개될 것이다. 또는 남자냐 여자냐, 보수주의자냐 진보주의자냐, 정치인이냐 유권자냐, 연방준비제도(FRB) 이사들이냐 다보스포럼(WEF)의 회원사들이냐, 전두엽이냐 두정엽이냐와 같은 질문이, 그들의 세부전공과 개별 연구에 알게 모르게 방향성을 만들어 주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답은 어떤가.



 

누군가의 지적처럼, 오스카 후보에 올랐던 이 애니메이션은 그저 철지난 풍자로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이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진 이후 자동차는 대륙을 넘어 서식지를 확대, 20세기 말기에 이르러 진정한 의미에서 전지구적 우점종의 지위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다만 이 애니메이션에서 하나 지적한다면, ‘earthling’이 ‘기생충’인 인간과 맺는 사슬 관계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가지라는, 즉 자동차의 관점에서 인간은 단일종이 아니라는 사실을 생략했다는 것이다.)

이 애니메이션을 끝까지 볼 생각이 없다면, 이렇게 설명하고 싶다. 20세기의 문맥에서 자동차는 마치 동사와 같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패션에서부터 도시계획까지, 응급의학에서부터 군사학까지, 인권운동에서부터 자본주의까지 지난 100년간 현대 문명이 구축해온 수많은 요소들은 자동차를 빼고는 설명되지 않는다. 현대 문명과 현대인의 정신세계는 자동차의 문법에 맞추어져 있다. 우리는 외계인이 사는 도시를 상상하는 것보다 자동차가 없는 도시를 상상하는 것이 더 고통스럽다. 심지어 야생동물들마저 나날이 자동차에 적응하도록 요구받고 있다.

그러므로 자동차가 지구의 주인이라는 말은 여전히 풍자에 지나지 않을지언정, 자동차가 지구의 주인공이라는 말에는 적어도 어떤 진실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어떤 장소의 발전상이라고 믿는 야경은, 사실상 그 장소가 자동차를 얼마나 존중하고 있는지를 선언하는 풍경이다.

Chicago | by Jim Richardson. Getty Images / National Geographic Creative


그런데 이제 그 주인공의 자리를 자율주행차가 넘겨받으려고 한다.

사실 자율주행은 전혀 낯선 아이디어는 아니다. 일찌기 <아라비안 나이트>를 읊었던 셰에라자드도, 김유신에게 참수당했던 명마도 생각했던 것 아닌가? 1950년대 미국의 전기회사 신문광고 속 자율주행차 일러스트레이션이라든가, 1960년대 애니메이션 <The Jetsons(우주가족 젯슨)>, 1980년대 TV 연속극 <The Knight Rider(전격 Z 작전)>와 같은 픽션들은 당시 사람들로 하여금 한 번쯤 자율주행차를 타고 다니는 세상을 생각해보게 했을 것이다.

한편 그 가운데는 그런 픽션이 주는 행복감을 자신의 과학적 또는 공학적 소질과 결부시켜 실제 기계로 구현하려 한 소수의 진지한 괴짜들이 있었다. 나중에 보다 상세히 설명하겠지만, 인간의 개입 없이 부분적으로 정해진 길을 달리는 자동차 모델은 1930년대부터 전문가들에 의해 공개적으로 구상되기 시작했다. 1980년대에는 복수의 연구팀이 현재 자율주행차 모델과 비슷한 체계의 기술 기반을 갖추고 일반 도로에서 시험용 차를 운전시키고 있었다. 2004년에는 캘리포니아에서 자율주행차 경주대회가 열렸다. 이들에게 자율주행차는 세대를 이어 온 숙제에 가까운 것이다.


그러나 많은 픽션 속에서나 그것을 본 우리 가운데, 또 자율주행차를 숙제처럼 생각해 온 전문가들 가운데, 정말로 자율주행차가 세상에 나와 자동차를 대체하는 과정과 그 파급효과에 대해 상상하고 고민해 본 흔적은 얼마나 있는가? 그런 고민은 불과 몇 년 전에야 시작된 것 같다. 자율주행차가 굴러가기 위해 일어나야 하는 일들과 일어날 일들, 즉 적용과 영향의 문제를 둘러싼 논의는 기업들이 자율주행 상용화를 목표로 삼고 나서야 가시화되고 있다.

지금 산업계가 그리고 있는 자율주행 시대는 그저 다수의 자율주행차가 도로를 달리는 시대가 아니다. 무엇보다 그 시대의 길목에서 자동차는 퇴출 대상이다. 그런 자율주행차의 등장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 마디로 우리가 100년 동안 썼던 문장에서 동사를 바꾸는 것과 같다. 이제 우리는 문장 전체를 새로 써야 한다. 자동차의 문법에 따라 온 현대 문명과 현대인의 정신세계가 전면개정의 대상이다.


주차장 주인은 주차장 부지를 공원화하는 데 기꺼이 내놓을까? 아무튼 나레이션은 티 없는 목소리로  “It will be better!”를 외친다.


아직 기술이 상용화되지도 않은 시점*에 이런 평가는 호들갑인가? 최근 1-2년 새 한국도 급속히 바뀌고 있다고 느끼는 가운데서도, 여전히 자율주행차를 일종의 ‘개선된 자동차’로 여기는 인식을 발견할 수 있다. 미국도 큰 차이 없어 보인다. 여기에는 정보 전달의 부족 또는 왜곡, 자율주행에 대한 개념 정의의 복잡함 같은 원인이 있을 것이다. 몇몇 자동차 메이커들이 기존 체제와 소비자, 또 자기 회사의 직원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전이적 단계의 모델을 출시하는 데 집중하는 현실 등도 한몫 할 것이다. 하지만 결국 10년 안에 우리가 경험할 수 있고 경험하려고 하는 자율주행은 자동차와는 완전히 다른 개념의 기술이다.

그렇게 결론짓게 하는 여러 갈래의 이유 가운데 가장 뚜렷한 하나만을 말하면 이렇다. 자율주행차를 일컫는 또다른 용어인 ‘driverless cars’가 묘사하는 것처럼, 자율주행이 전면화된 세상에는 운전자가 없다. 대신 승객만이 있다. 자동차에서 운전석이 사라지고 세상에서 운전자라는 역할이 사라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수많은 운전자가 가지고 있던 운전 및 조작 능력, 주행 중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판단, 그 판단에 따르는 책임, 정비와 보관의 의무뿐만이 아니라, 소유권, 직업, 지위와 가속의 욕망, 주체적 자유감, 도시공간의 인식과 기억, 전통과 예절, 사교와 낭만 같은 것까지 남겨둔 채 떠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자율주행을 현실화한다는 것은, RoboCup 운동장에 보다 잽싼 로봇들을 풀어놓는 것 같은 시도와는 차별된다. 무엇보다, 축구하는 로봇들이 국가대표 축구선수들을 비난하거나 조기은퇴시킬 가능성은 희박한 반면, 자율주행은 자동차를 비난하며 조기은퇴시키려는 확실한 의도와 가능성을 띠고 등장했기 때문이다. 자동차와 운전자가 빠르게 사라지고 소유와 서비스 구조가 바뀐다는 것은 새로운 규칙, 전에 없던 체제의 급격한 등장, 그것을 위한 수많은 이해관계자의 노력 또는 희생의 수반을 의미한다.


이렇게 볼 때, 자율주행은 실체의 모호함을 제외하고 기본적인 목적과 접근방식만 놓고 보더라도 핵심기술, 기반시설, 사용자 행태, 산업구조, 시장모델, 상징, 제도-정책, 과학기술적 지식기반 등의 면에서 우리 사회가 자동차를 중심으로 한 세기 쌓아올린 체계의 구성물들로부터 혁신하거나 결별할 것을 요구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런 변화는 과학·기술사 또는 혁신 연구에서 말하는 전형적인 체제 전환(regime shifts)에 해당할 것이다. 예를 들어 과거 인류가 야금술, 인쇄술, 증기기관을 발명하고 활용하면서 겪은 심대하고 광범위한 사회적 파급효과처럼 말이다.



1830년대 대서양을 횡단할 수 있는 증기선의 개발과 상용화는 19세기 이민자 폭증의 필요조건이었다. 또한 증기기관의 광범위한 활용은 미국 내 제조업의 성장을 견인함으로써 더 많은 이민자 유입을 가져왔다.


그런데 이렇게 엄청난 변화를 예고하는 자율주행 시대를 인류에게 주어진 길로 어리둥절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적 당위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 사회는 지금껏 자율주행을 진지하게 원한 적도 없고, 그렇다고 2007년 1월 스티브 잡스가 들고 나온 아이폰을 처음 보았을 때처럼 이구동성으로 “어머 이건 사야 해!”를 외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무슨 장삿속에 휩쓸려 버린 것은 아닌가.

기술 혁신을 둘러싼 이러한 의구심과 논쟁은, 특히 극소수가 만들어낸 혁신적 기술이 배타적 지적재산권 또는 자본력으로 보호받는 가운데 그들이 원하는 속도 - 대개 ASAP - 로 상용화 트랙을 밟는 오늘날 구조적으로 불가피해 보인다. 실제로 여러 기술이 도입기에 그 정당성을 놓고 치열한 사회적 논쟁이 이루어진 경우를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리고 이들 논쟁에서 소위 혁신가들은 일부 판정승을 제외한 대부분의 경우 KO승을 거두었다.** 우리는 날마다 혜택받도록 강제된 수백 가지 기술들 중 단 하나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애써 어질거림을 감추고 살아간다.

그들의 강력한 주무기 중 하나는 일명 헨리 포드의 ‘더 빠른 말’ 논리다. “사람들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다면, 더 빠른 말이라고 답했을 것이다.”라는 말. 포드가 실제 하였든 하지 않았든, 이 말은 과학기술의 시대 여명기 지적 탐험가들이 남긴 전설 같은 활약상부터 이 순간 실리콘밸리의 유니콘을 꿈꾸는 창업가들의 정신세계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시대정신을 포착해내는 표현이다. 이 유명한 문장의 간결하고 창쾌한 냉소는 세간의 토 다는 자들을 머쓱하게 주저앉히고, 혁신의 주역을 제외한 나머지를 순간 얌전한 청중으로 만들 만하다.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자율주행기술을 이끄는 혁신가 세력은 포드가 만든 대중화된 자동차가 결과적으로 ‘더 빠른 말’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 19세기 대도시를 뒤덮었던 말과 마차가 그랬듯, 20세기 말 자동차는 사회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배설물을 남기고, 이용되지 않는 대부분의 시간에도 공간과 돈을 잡아먹고, 여기저기 도로 혼잡을 일으키고, 전쟁 없는 도시에서 목숨을 위협하는 주된 원인이 되고 있다. 이제 우리가 냉소할 차례라면, 포드는 역사상 가장 혁신적인 방법으로 자신이 ‘사람들’의 일원임을 증명한 것이다.

이 100년의 냉소 끝에서, 우리는 적어도 한 번은 소통의 기회를 얻을 자격이 있지 않을까? 서로 낯설겠지만, ’더 빠른 말’보다 더 나은 혁신을 가져다주겠다는 그들에게 그것에 대한 소상한 설명을 듣고,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할 기회를.


2편에서 계속


* 그러나 이 글을 준비하는 동안 Uber는 시범적으로나마 자율주행 택시를 내놓아 일반 승객을 대상으로 3만km 이상을 서비스하였고, Tesla는 복수의 사고 보고에도 불구하고 Autopilot 기능을 고도화하며 자율주행 이용 범위를 확대하였다.

** 누군가는 가령 시민사회와 학계의 노력으로 형성된 국제적 담론에 의해 프레온(CFC)와 같은 기술이 판정패한 것 아니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CFC는 그 문제점이 과학적으로 밝혀진 다음에도 한동안 사용되었으며, 몬트리올 협약으로 생산-사용에 대한 전세계적 규제가 시작된 1987년은 이미 듀퐁의 특허권이 만료된 이후였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이제 수많은 현대인이 CFC의 마법과 같은 기술 혜택을 당연시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제 우리는 냉매 없는 세상을 생각할 수 없게 되었고, 그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대체 물질의 개발과 판매는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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