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유럽에서의 참극은 그러나 피셔와 같은 자동차쟁이들로 하여금 더 좋은 레이싱 환경을 갈망하도록 자극할 따름이었다. 피셔의 친구와 라이벌들도 레이스 도중 사고로 크고 작은 부상을 당했고, 그들의 차에 치여 사망한 관중들도 있었다. 이러한 경험은 트라우마를 남길 만도 한데, 그러나 남아있는 기록 어디에서도 그가 레이싱 자체를 회의적으로 바라보았다는 흔적은 찾을 수 없다. 대신 그의 서른 즈음에 대한 기록은 사업가로서의 활동 외 대부분의 정력을 레이싱에 투자하며 레이싱 전용 트랙을 꿈꾸고 구상한 흔적으로 채워져 있다.

레이싱 전용 트랙의 필요성에 대한 피셔의 생각은 그가 속한 맥락에서 대담하고 창의적인 것이었을 수 있지만, 사실 그런 생각은 피셔 말고도 여럿이 하고 있었다.* 1903년경에는 프랑스뿐 아니라 많은 국가가 공공도로에서의 레이싱을 전면 금지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유가 무엇이든 레이싱을 멈출 수 없었던 자동차계는 별도의 환경을 조성하는 데에도 힘을 쏟기 시작했다.** 벨기에 자동차클럽은 프랑스와의 국경 근처에 최초의 전용 서킷인 86km짜리 Circuit de Bastogne을 조성하여 1902년부터 레이스를 벌이고 있었다. 뉴욕의 Vanderbilt II나 영국의 Locke King과 같은 백만장자들도 1906년경부터는 사비를 투자해 전용 트랙을 건설하고 있었다. 자동차 애호가인 이들은 각각 미국과 영국의 뒤늦은 자동차 기술-산업이 프랑스를 위시한 유럽대륙에 대응하는 경쟁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영국과 미국은 물리적 사회문화적 제약으로 자동차가 자유롭게 달릴 수 있는 도로가 한층 더 부족했다.*** 그들의 눈에 양호한 레이싱트랙은 자국 자동차 기술 발전의 핵심 필요조건이었다. 특히 미국은 주요 국제 레이스마다 실격과 꼴찌 사이를 왔다갔다하며 기술적으로나 경험적으로나 부끄러운 열세를 드러내고 있었다.


기록을 추적하는 사람들에 따르면, 전용 트랙 건설이 이 국가적 격차를 극복하고 쾌적한 레이싱을 즐기기 위해 그가 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피셔가 확신하게 된 것은 1905년 이전의 일이다. 그는 다년간의 견문과 경험을 토대로 당시 자동차 성능에 걸맞는 스펙타클을 위해 적어도 3마일, 이상적으로는 5마일 길이의 레이싱 전용 트랙이 필요하며, 그의 무대인 인디애나폴리스에 그런 트랙이 있으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했다. 1905년부터 피셔는 여기저기 글을 쓰고 인터뷰를 하며 대형 레이싱 트랙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다녔다.


“… 사람들은 1마일과 3마일의 트랙 사이에 얼마나 커다란 차이점이 있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 나는 Vanderbilt Cup과 Bennett Cup을 포함해 우리나라와 프랑스에서 열린 대부분의 대규모 자동차 행사와 레이스를 관람한 사람으로서, 결국 레이서와 대중 모두가 선호할 만한 성공적 레이싱 코스는 3마일 또는 5마일 길이의 원형 코스라고 생각합니다.

… 미국 제조사들은 매년 수천 달러를 써가며 고속 레이싱카를 만들지만 프랑스의 자동차와 경쟁하여 이길 가망이 없습니다. 이것은 대체로 미국 레이서들이 장거리를 고속주행하며 제조상 약점을 철저히 테스트하거나 차량에 온전히 적응하여 고속에서 완벽히 통제할 수 있도록 하는 기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 운전자를 위험하게 하는 벽이 없고, 제대로 된 관람석, 연료 및 윤활유 공급 부품점과 기타 편의시설이 있는, 제대로 설계된 5마일짜리 트랙이라면 Vanderbilt Cup 같은 레이스 한 번으로 전체 건설비용의 절반을 충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자동차 잡지 Motor Age, 1906. 11.


당시 피셔는 막 시작한 Prest-O-Lite 사업을 궤도에 올려놓느라 바빴던 데다가 다른 백만장자들처럼 막대한 건설 비용을 스스로 조달할 수도 없었다.**** 당시에는 업계 친구들과 유지들을 설득하며 다니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러나 그가 처음 내세웠던 5마일 트랙을 조성하는 데 필요한 800에이커(3.2km2)는 미국의 스케일로도 너무나 거대한 땅이었다. 일단 인디애나폴리스 일대에서 그만한 규모에 평지로 된 마땅한 필지를 찾을 수가 없었다. 당시 인디애나폴리스는 자동차 산업이 가장 활발한 도시 중 하나였음에도, 그 정도 야심찬 사업이 가능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을 모으는 것 역시 힘들었다.

그러던 중, 1907년 방문한 영국에서 막 개장한 2.75마일(4.43km) 길이의 Brooklands 서킷을 보고 그는 감명 내지 충격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영국 귀족 집안의 부호가 유럽의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을 불러들이고 자신의 전재산을 붓다시피 해 만든 이 트랙은 당시 기술로는 유지보수가 불가능할 만큼 새로운 건조물이었다. 이 트랙은 개장 직후 열린 24시간 레이스(주어진 24시간 동안 얼마나 먼 거리를 달리는지 기록하는 레이스)에서 바로 피셔의 후원으로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세워졌던 1905년 기록을 갈아치워버렸다. 피셔에게 1907년의 영국은 포장된 타원형 트랙의 가능성을 두 눈으로 확인하는 동시에 그가 실천력에서 뒤쳐졌음을 인정해야 하는 경험이었다. 드러난 성정으로 미뤄보건대 그는 그때 ’최초’의 타이틀을 빼앗겼다며 혼자 분해했을 법하다. 더 이상은 미룰 수 없었다.


목표속도 120mph(193.1km/h)로 설계된 Brooklands는 약 300에이커(1.21km2)의 부지 위에 트랙 폭 100ft(30.5m), 커브구간 바깥쪽이 약 30ft(9.1m) 들어올려진(banked) 건조물로 주 트랙 전체가 철근콘크리트제다. 최대 2,000명의 인력이 현장에서 숙식하며 9개월만에 지었는데, 당시로서는 불가사의로 여겨질 만한 토목학적 성취였다. From Brooklands Musuem.


* 어떤 면에서 그것은 그 시대 미국 중서부를 기반으로 자수성가한 사람이 갖는 여건상 한계였다. 미국은 분명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는 나라였지만, 20세기 초까지도 늘 유럽을 쳐다보는 변방국가였다. 그렇기에 남북전쟁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유럽과 가까운 동북부 도시들이 국내 문화적 주도권을 가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 가령 1903년 7월 열린 Gordon Bennett Cup은 대회 규범상 전년도 우승국인 영국에서 개최해야 했지만 영국에서는 레이싱이 금지되어 있었다. 때문에 주최측은 잉글랜드를 피해 아일랜드에서 대회 개최를 추진하였다. 대회 유치에 호의적이었던 아일랜드는 레이스를 지원하기 위한 법을 신설하였고, 주최측은 이런 지원 하에 서킷을 꾸며 대회를 치렀다. 83.5km 길이의 Athy Circuit의 안전을 통제하기 위해 7천 명의 경찰이 투입되었다.

*** 이에 대해서는 양국 각각에 별도의 장을 할애해야 할 정도의 복잡한 사정이 있어 보인다. (미국의 사정에 대해서는 앞에서 간단히 설명했으므로) 영국의 사정에 대해 내가 지금까지 살펴본 바를 거칠게 설명하자면 이렇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영국도 19세기 수운과 철도를 적극적으로 사용했다는 점, 상대적으로 중앙권력보다는 지방자치에 의한 사회 운영이 이루어졌다는 점, 보편화된 마차와 말이 도로에서 누렸던 권리를 자동차가 심각하게 빼앗아간다는 점, 초기 자동차의 기술적 한계로 인한 소음, 매연 등 불쾌감과 운전자들의 운전 행태상 위험성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 반응이 거셌던 점 등이 요약 가능한 이유들이다.

**** 그러나 몇 년 후 그는 백만장자가 되었다. 그는 1904년 특허권자 Percy C. Avery 그리고 친구 앨리슨과 동업하여 압축 아세틸렌을 이용한 차량 전조등 사업을 시작하였다. 초기 자동차는 조명이 없거나 마차에 쓰던 촛불 램프를 달고 다녔기 때문에 야간 주행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아세틸렌은 휘발성이 강해 다루기 까다로운 물질이지만 훨씬 높은 광량을 지속적으로 제공할 수 있었다. 1906년 Avery가 회사를 떠난 가운데, 가능성을 확신한 피셔와 앨리슨은 초기 15번 이상의 공장 폭발사고에 따른 수난과 송사에도 불구하고 개발을 계속했다. 결국 석면을 이용해 기술적 안전성을 확보한 ‘Prest-O-Lite’는 별다른 경쟁자가 없던 전조등 시장을 사실상 독점하여 전세계에 등과 충전용 캔을 공급했다. 1910년 기준 회사의 가치는 약 6백만 달러였다고 하며, 1917년 그들은 9백만 달러에 회사를 Union Carbide에 매각했다. (소비자물가지수 기준 2017년 현재 약 1.88억 달러)


'urban mobilit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동차의 사회사: 칼 피셔-3  (0) 2017.09.02
자동차의 사회사: 칼 피셔-2  (0) 2017.09.01
자동차의 사회사: 칼 피셔-1  (0) 2017.09.01
지구의 주인-2  (0) 2017.04.03
지구의 주인-1  (0) 2017.04.03
댓글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