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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싱

앞서 보았듯 피셔는 뉴비와 함께 잠깐이나마 자전거 트랙 Newby Oval 사업에 참여한 경험이 있었다. 무엇보다 그 자신 소문난 속도광이자 자전거 레이싱계의 언더독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을 감안하면, 피셔가 자동차 레이싱에 뛰어든 것은 전략적 선택이라기보다는 본능과 관성에 따른 자연스런 반응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하지만 인디애나폴리스에 자동차 레이싱 전용 트랙을 구상을 시작할 때 그는 자동차 레이싱의 전략적 중요성도 충분히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당시 자동차 레이싱의 전략적 중요성이란 무엇인가? 

인류와 함께 해온 레이싱의 기나긴 역사를 차치하고라도, 각종 스포츠 관람 문화가 발달한 당시 유럽과 미국에서 레이싱은 대중적으로 친숙한 오락거리이자 검증된 홍보수단이었다. 한편 19세기 대서양 양안은 유명인사 즉 셀럽(celebrity) 문화가 만개한 세계였다. 큰 레이싱 대회의 우승자와 후원자는 이튿날부터 신문과 잡지를 통해 전국구 스타로 올라설 수 있었고, 사교계는 그런 영웅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즉 그때에도 레이싱은 대형 스타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쇼비즈니스였다. 이런 쇼비즈니스를 통해 자동차는 자연스럽게 대중의 관심과 욕망의 대상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자동차 레이싱은 선수만큼이나 제조사를 유명하게 해주는 기회였다. 초기 자동차 업계는 그야말로 백가쟁명이었다. 자동차의 후발국인 미국에서도 1900년 즈음에 와서는 수백 개의 제조사가 자동차를 만들어 팔았는데, 말이 제조사지 대다수는 작은 창고에서 조수 몇 명을 데리고 수작업하는 기술자의 실험실에 지나지 않았다. 엔진, 연료, 바퀴, 차체, 소재 등 대부분에서 아직 통일되거나 합의된 바가 없었기 때문에, 이 개척자들은 각자가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자동차를 만들어냈다. 소비자들은 이런 깡통시장 같은 분위기 속에서 믿을 만한 자동차를 고르기 위해 성능의 검증을 원했다. 그리고 (성능에 자신이 있었던) 제조사들은 자신의 기술이 타사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했다. 레이싱 대회장은 바로 이들이 만나고 싶어할 만한 장소였다.

이의 연장선상에서 레이싱은 기술을 실증하고 개선하는 시험장이기도 했다. 그나마 반듯한 도로가 있는 도시는 늘 보행자와 마차로 가득했고, 도시 바깥의 지역은 도로가 없거나 열악했다. 레이싱은 당시 자동차의 내구성을 포함한 성능 전반을 마음껏 시험할 수 있도록 거의 유일하게 허용된 기회였다. 더구나 초기에는 제조사의 창업자나 기술자가 레이서로 뛰는 일이 흔했다. 레이싱 대회는 자동차인들끼리의 경쟁의 장인 만큼이나 상호 소통하고 교류하는 장이기도 했다.


1899년 위스콘신 주의 어느 시골길. 오늘날의 자동차도 이런 도로에서는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from Winconsin 101.


하지만 레이싱에 대해서는 분명 합리적 태도를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었다. 말하자면 자동차는 걸음마를 떼자마자 경기장으로 불려나왔다. 유럽에서는 당시 기술와 문화의 중심지였던 프랑스를 중심으로 1894년부터 대대적으로 홍보된 자동차 레이싱이 이루어졌다. 미국에서도 1895년 Chicago Times-Herald race를 기점으로 자동차와 자동차 레이싱이 대중의 폭발적인 관심을 받기 시작한 터였다. 뉴욕의 언론재벌 Gordon Bennett은 국가대항전 형식의 Gordon Bennett Cup을 개최하여 자동차계 명성과 기술의 국제 경쟁을 부추겼다. 후일 피셔의 친구가 된 뉴욕 출신의 상속부호 Vanderbilt II는 뉴욕 롱아일랜드에 전용도로를 건설하고 거금의 상금을 내건 Vanderbilt Cup을 열어 논란과 동시에 대흥행에 성공하였다. 각국의 자동차클럽을 중심으로 열린 크고 작은 도시간 레이스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대륙 종주, 업힐 레이스와 같은 극한 드라이브도 종종 이루어져 미디어에 소개되었다. 대중 앞에 자동차가 선보인지 10년만에 대서양 양쪽에서 이런 일들이 촘촘하게 일어났다. 모두가 자동차의 힘과 속도를 두고 흥분했던 것 같다. 그 분위기 속에서 적지 않은 사고와 인명피해가 나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피셔는 1901년경부터 그의 동생을 포함한 친구들과 중서부 곳곳을 다니며 자동차 레이싱 행사*를 벌였는데, 이것은 그의 취미이자 쏠쏠한 돈벌이였다. 하지만 호기로운 젊은이들의 취미활동에 그치는 것은 아니었다. 후일 미국의 전설적인 레이서로 남은 바니 올드필드(Barney Oldfield)를 포함해 피셔와 쏘다니던 그들은 명실상부 1세대 프로 레이서였다. 피셔도 엘리트 레이서가 되기 위해 여러 차례 국제대회에 문을 두드렸다. 이는 당시 다른 진지한 레이싱처럼 그들의 레이싱이 매우 위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의 레이싱이 위험했던 것은 근본적으로 자동차의 속도가 비약적으로 빨라졌기 때문이다. 최초의 자동차 레이싱이라 불리는 1894년 파리-루앙(Rouen)간 126km 레이스에서 공식 우승자는 평속 18.7km/h로 달렸다. 이것은 같은 시기 지역 자전거 레이스 기록보다 느린 속도였다. 그러나 10년 뒤 Gordon Bennett Cup 우승자는 512km를 평속 94.3km/h로 달렸고, 우승을 노리는 자동차들의 제원상 최고속도는 140km/h를 넘기고 있었다. 그럼에도 빨라진 속도에 상응하는 안전장치의 발전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에어백과 안전벨트가 등장하기 50년 전이었고 바람막이조차 없었다. 핵심부품이 고장나거나 망가지는 경우가 너무도 잦았지만 출발선에서 고장이 나거나 도중에 멈춰서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달리던 자동차가 갑자기 통제를 잃게 되면 레이서와 조수는 하늘에 운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레이싱 트랙의 열악한 노면 상태는 레이싱의 위험을 배가시켰다. 기차의 경우 이미 19세기 중반에 100km/h을 상회하며 운행하는 노선도 있었지만, 토목공학계는 레일이 아닌 도로에서 이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는 물체를 감당할 수 있는 노면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다. 설령 알았다 해도, 도시간 레이스에 사용된 공공도로에 신기술을 적용할 재원이나 행정력이 없었다. 결국 초창기 레이서들은 비포장길의 뿌연 먼지 속에서 고랑을 피해 다녀야 했고, 고랑을 밟거나 웅덩이에 미끄러진 자동차는 곧장 길가에 서 있던 관중을 덮치고는 했다. 여전히 자동차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던 사람들은 이 기계가 얼마나 위협적일 수 있는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레이싱카를 구경하기 위해 너무 가까이 붙어서거나 아예 도로로 들어가곤 했다. 관중들의 이런 행동은 레이싱 중 사고 위험을 또 한 번 높이는 요인이 되었다.


이런 이유들로, 초기 레이싱은 우승의 영광만큼이나 각종 사고로 점철되어 있었다. 레이싱카가 전복하면서 드라이버와 조수가 죽거나 중상을 입는 일은 흔했고, 트랙을 이탈한 자동차에 깔려 죽거나 트랙에 들어섰다 치여서 죽는 관중도 레이싱 관련 뉴스의 단골 기사거리였다. 프랑스, 벨기에, 독일에 걸친 1,105km의 도로에서 펼쳐졌던 1901년 파리-베를린 레이스는 사상 최대의 레이스인 동시에, 2천여 명의 스탭과 수천 명의 경찰과 군인이 통제한 이벤트였다. 그러나 통제선을 넘어 도로에 들어간 아이가 레이싱카에 치여 사망한 사건을 방지할 수 없었다. 레이싱계는 거센 비난 여론에 직면했고, 자동차 종주국으로서 레이싱의 열기가 그 어느 나라보다 높았던 프랑스마저 자동차 레이싱을 금지한다고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권력층과 가까웠던 자동차 단체와 업계는 정부의 조치를 금세 해제시킬 수 있었지만, 레이싱 안팎의 교통사고를 막을 힘은 여전히 없었다.

1903년 5월 10만 관중이 출발선에 몰려든 파리-마드리드 레이스는 다시 한 번 사상 최대의 이벤트였지만 결국 “죽음의 레이스(The Race to Death)”라는 오명으로 전세계에 기사화되었다. 이 레이스는 파리-보르도 레이스라고도 불리는데, 그것은 도중에 너무 많은 레이서와 관중이 죽거나 다친 나머지 프랑스 정부가 기착점인 보르도에서 경기를 중단시켰기 때문이다. 경기가 1,307km 중 552km까지 진행되었을 때 5명의 레이서와 3명의 관중이 사망했고, 100여 명이 부상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과장된 소문은 훨씬 흉흉했다. 이 사태로 프랑스 정부는 다시금 공공도로에서의 레이싱을 금지했고 이제는 자동차 업계도 어쩔 수 없었다.


* 그들의 레이스를 ‘행사’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것이 엄정한 룰에 의한 경쟁이라기보다 유료로 입장한 관중들에게 드라마틱한 경험을 선사하기 위한 쇼였기 때문이다. 쇼의 주인공이었던 피셔와 올드필드는 중간 라운드에서 일부러 지거나 차량이 고장난 척하다가 마지막 레이스에서 간발의 차로 승리하는 내러티브를 즐겨 사용했다고 한다. 이런 에피소드는 피셔의 사회활동에서 두드러진 쇼맨십과 홍보가적 기질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그는 대인관계에서는 말수가 적고 수줍음을 타는 편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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