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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광

피셔는 1874년 미국 인디애나 주의 넉넉하지 않은 가정에서 삼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운동신경이 남달랐고 재주가 많았지만, 선천적인 고도난시를 겪어 학업에는 집중하기 힘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에서도 의무교육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시대, 일찌감치 12세에 학교를 관둔 그는 알코올 중독자였던 아버지가 떠나버린 가계를 돕기 위해 직업전선에 뛰어들었다.

그가 뛰어든 전선은 고향 근처 급성장하던 도시 인디애나폴리스였다. 유년기 피셔가 겪었던 19세기 후반은 철도가 수운을 꺾고 골드러시를 이끌며 미국의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으로 등극하던 철도 황금기였다. 지리적으로 당시 이미 세계적 대도시 중 하나였던 시카고 바로 아래 위치하면서 중서부 철도교통의 허브로 기능했던 인디애나폴리스는 그에게 기회의 도시였다. 그는 기차 내 잡화상, 서점 직원, 은행 보조원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워낙 손님을 상대하는 넉살이 좋기도 했거니와, 그는 이런 일들을 하며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사람들이 무엇에 반응하고 흥미를 갖는지 빨리 깨달았던 것 같다. 그는 가족을 부양하면서도 17세에 600달러를 모았는데, 이는 다른 두 형제와 함께 시내에 조그마한 자전거 수리점을 열 만큼의 액수였다.

젊고 물정에 밝았던 피셔에게 자전거 수리점은 첫 사업으로서 일단 합리적인 업종 선택이기도 했지만, 자전거는 그에게 사업 아이템 이상의 무언가였다. 1876년 영국에서 개발된 이후 성능과 안전에서 진화를 거듭한 ‘safety’형 자전거는, 기존의 보다 매니악했던 ‘penny-farthing’형 자전거를 대체하며 19세기 말 서구 사회에 자전거 광풍(bicycle craze)을 만들어냈다.* 당시 미국에서 자전거는 야구에 버금가는 대중스포츠였다. 스포츠광에 속도광이었던 피셔에게 자전거는 그를 미치게 하는 물건이었다. 그는 지역 자전거 클럽 ‘Zig Zag Cycling Club’의 주요 멤버로 활동했을 뿐 아니라 자전거 경주팀의 선수로 이름을 알리기도 하였다. 또 기계를 좋아했던 그는 자전거 수리점에서 이런저런 실험을 거듭하면서 기술적 지식을 쌓아나갔다. 워낙 야심찬 행동가였던 그는 몇 년 후 사업을 확장해 자전거 판매업을 겸하면서 자신의 경험에 기반한 개량 모델 ‘Fisher bicycle’을 제조 판매하기도 하였다.


젊은 시절 자전거 타던 피셔(왼쪽). from Fisher (2014) The Pacesetter.


그런데 당시 미국의 도로 사정은 자전거에, 보다 근본적으로는 바퀴라는 것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19세기는 도로포장기술에 있어서도 혁신의 세기였지만 실제 적용에 필요한 경제성과 표준화를 위해서는 갈 길이 남아 있었다. 또 그 시절에는 도로에 접한 건물의 소유주들이 포장 여부를 결정하고 비용을 부담해야 했는데, 의사결정 과정에서 도시행정이 별다른 조정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많은 주민들은 집앞 도로가 더러운 진흙탕이 되길 원치 않았던 만큼이나 마차로 붐비길 원치도 않았다. 더구나 목재포장부터 아스팔트까지 여러 포장방식이 경합하던 시절이었다. 자연히 도로는 얼룩덜룩해졌다. 또 여전히 말이 주된 교통수단이었기 때문에 도로 포장은 말발굽과의 궁합이 중요했다.** 오늘날에는 '포장도로'를 지칭하는 ‘macadam’은 정확히는 당시 가장 인기 있는 자갈 포장 방식을 일컫는 용어이자 그 개발자의 이름(eponym)이었다.

무엇보다 19세기에 이런 논의는 일부 대도시 지역에서나 가능할 뿐, 시골길은 사실상 전부 비포장길이었다. 피셔의 무대였던 인디애나폴리스도 20세기가 되던 시점에 도심부 내 비포장길이 흔했다. 1888년 발명되어 아직 내구성이 좋지 못했던 공기타이어(pneumatic tire)는 이런 길에서 쉽게 펑크가 났다. 자갈이나 벽돌로 산책길을 포장해놓고 자전거 운전자들에게 입장료를 받아 돈을 버는 사업이 있었을 만큼 좋은 도로는 희소한 자원이었다.


Plan of the City of Toronto (1909). 각 색상과 음영은 서로 다른 포장방법을 뜻한다. 비록 미국 도시는 아니나 이 지도는 당시 북미 도시의 상황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from Toronto Reference Libarary.


19세기 말 자전거는 기술적으로 최고 50km/h의 속력을 내기 충분한 수준에 있었다. 자전거 탄 사람들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열악한 도로환경에서도 민폐 수준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레이싱을 펼쳤지만, 피셔와 같은 자전거 매니아들은 이상적인 환경에서 극한의 속도를 즐기고 싶어했다. 그래서 Zig Zag Cycling Club의 피셔와 제임스 앨리슨(James Allison)은 클럽 설립자이자 부유한 사업가 친구였던 아서 뉴비(Arthur Newby)와 의기투합해 자전거 전용 트랙을 건설하였다. (이들은 이때부터 평생의 친구이자 동업자가 되었다.) 

바퀴가 미끄러지지 않도록 특수처리한 잣나무 널빤지를 깔고 1.5만 석 이상의 관람석을 갖춘 400m 원형코스가 1898년 인디애나폴리스 북쪽에 건설되었을 때, “Newby Oval”이라 명명된 벨로드롬은 미국에서 가장 훌륭한 트랙으로 평가되었다. 이 경기장은 당시 전국 10만 회원을 둔 미국자전거인연맹(League of American Wheelmen)의 1898년 8월 연례총회 개최지가 되었고, 앞선 독립기념일 대회에도 2만 명이 몰리는 등 관심을 끌었다.

그런데 얄궂게도 바로 이 시기부터 자전거 광풍이 급속히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유행이 지나자마자 수지에 맞는 레이싱 자체를 성사시키기 어려워졌다. 설계상 자전거 레이싱 외 딱히 용도가 없었던 Newby Oval은, 1900년대 들어 이따금 보드빌쇼나 고등학교 체육행사 등에나 사용되다 1910년경 철거되기 전까지 사실상 버려졌던 것 같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대중보다 먼저 자전거에 정을 떼기 시작한 것은 Zig Zag Cycling Club 친구들이었다. 그들의 시야에 자동차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들이 갈망한 것은 자전거가 아니라 속도였기에, 그들은 곧장 자전거를 내던지고 자동차에 탐닉하기 시작했다.


피셔는 이런 일에 둘째 가라면 서러운 인물이었다. 그는 1898년 프랑스 De Dion-Bouton의 2.5마력짜리 삼륜 모터사이클을 사들임으로써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처음으로 ‘자동차(motor vehicle)’라는 것을 소유한 사람 중 하나가 되었고, 1900년 그의 자전거 판매장에서 시작한 자동차 딜러업은 미국에서 처음은 아니지만 거의 최초였다고 전해진다. 그는 뛰어난 마케팅으로 그의 사업을 성공시키는 동시에 중서부에서 자동차를 상징하는 인물의 하나로 점점 부상하게 되었다.

이 시절 그의 뛰어난 ‘마케팅’이란 사실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촌스럽고 괴팍할 따름이다. 그래도 성과로 볼 때 당시 대중에게는 확실히 먹히는 방식이었던 것 같다. 자전거 판매업 시절부터 그는 스턴트가 포함된 이벤트를 즐겨 했다. 인디애나폴리스 중심가에서 자전거로 외줄타기를 한다든가, 높은 건물 옥상에서 자전거를 떨어트리고 프레임을 주워오는 사람에게 새 자전거를 경품으로 준다든가, 피아노와 피아니스트를 큰 풍선으로 띄워 연주하게 하면서 행운의 숫자를 넣은 풍선 천 개를 날려보내기 등. 소란죄 체포를 감수하며 벌인 이런 프로모션들 덕분에 그는 중서부 일대에서 “미친 피셔”로 통했다. 그의 자전거 판매업이 지역의 자전거 붐을 이끌며 크게 성공했던 것으로 볼 때 그 별명은 나쁜 뜻은 아니었던 것 같다.

자동차 판매업을 시작했을 때 그의 마케팅 전략도 자전거 팔던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자동차를 도심지 건물 옥상에서 떨어트린 다음 시동을 걸어 군중 사이를 운전해 지나다녔고, 애드벌룬에 고객들을 실어 띄웠다. 그러나 자동차는 자전거에 비해 기술적 요구도가 훨씬 높고 가격 대비 경제성이나 안전성 측면에서 리스크가 큰 상품이었다. 낯설고 위험하게 느껴지는 물건에 대한 잠재 수요층의 결심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다른 마케팅 전략이 필요했다. 피셔에게, 그리고 많은 자동차쟁이들(motorists)에게는 레이싱이 바로 그 전략이었다.


* 현대인에게 ‘penny-farthing’은 우아하고 고전적인 느낌의 자전거로 보일지 모르나,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에게 이 자전거는 ‘boneshaker’로 불릴 만큼 불편하고 위험했고, 그러면서도 비쌌다. 기어-체인 구동장치가 없던 당시 앞바퀴는 완충 효과와 주행 속도를 위해 기형적으로 커졌지만, 이에 따르는 위험을 완화해주는 장치는 사실상 없었다. penny-farthing을 타고 달리는 중 앞바퀴가 무언가에 걸리면 운전자는 머리부터 앞쪽으로 튕겨나가게 되기 때문에 이를 위한 착지기술을 습득하는 것이 중요한 과정이었다. 이런 이유들로 penny-farthing 시대 자전거는 교통수단이라기보다는 젊고 부유한 남성들의 사치스런 취미에 가까웠다.

** 또다른 고려요소는 말의 분뇨를 비롯한 오물 처리의 용이성이었다. 자동차 옹호론자들에 의해 다소 과장되었다는 지적도 있지만, 마차가 지배했던 19세기 대도시의 도로 오물 문제는 위생-보건 및 미관 차원에서 분명 심각한 사회문제였다. 이런 측면에서 ‘말 없는 마차(horseless carriage)’라 불렸던 자동차는 신기술을 통한 사회문제의 해결이라는, 미국 진보시대(Progressive Era) 대단히 강력한 프레이밍을 등에 업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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