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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an mobility

지구의 주인-2

glasvase 2017. 4. 3. 21:48

1편에서 계속.



사실 그들은 이미 설명을 준비해 왔고 조금씩 설명하고 있다. 앞서 자율주행기술을 이끄는 혁신가 세력(이후 자율주행 개발세력)을 말 안 통하는 점령군인 양 묘사했으나, 그들의 태도와 이미지는 적어도 드러난 바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 당연하게도 자율주행 개발세력은 몇몇을 제외하면 지난 세기 자동차를 몰고 나타난 선배들보다 훨씬 세련되고 조심성 있다. 그들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자율주행차에 즉각적으로 호응하지 않을 뿐더러 의심의 눈길을 보낼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게다가 지금은 한 세기 전과 달리 과정상의 소소한 불상사마저 그 즉시 있는 그대로 전세계에 공유되는 세상이다. 아무리 거만하고 야심찬 도전자라도 몸을 사릴 수밖에 없다. 특히 몸집이 큰 전통적 자동차 메이커들은 ICT계 기업들의 스퍼트에 보조를 맞추면서도, 그들의 규모와 지위에 걸맞는 비즈니스 모델로 어떤 것이 좋을지를 놓고 어쩔 수 없이 신중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들은 보수적 태도를 견지하면서 메시지를 던지고 반향을 살피는 모양새다.


자율주행차 개발세력이 자신의 노력과 지향점이 가지는 의의를 잘 설명해야 할 이유는 또 있다. 자율주행은 자율주행차만으로는 작동하지 않는다. 불확실하고 골치 아픈 숱한 이슈들을 차치하고 도로의 범위에만 국한하더라도, 가령 자율주행차를 위한 교통신호체계 개편과 관련 기반시설 설치, 자율주행차와 네트워크 간 고속 저지연(low-latency) 통신을 보장하는 광역 무선통신체계, 로봇 인식에 혼란을 주지 않는 도로 관리·보수, 자율주행차 행동패턴에 대한 인간 운전자와 보행자의 적응 등은 자율주행 개발세력의 영향력을 완전히 벗어나는 과제다. 자율주행차 개발세력의 비즈니스 모델이 무엇이든 공공부문의 투자, 관련산업과의 협업, 대중의 이해와 적응을 이끌어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착실히 명분을 쌓고 공감대를 형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지금까지 다듬어져 왔고 비교적 높은 공감대를 형성한 설명의 내용은 ‘자율주행의 사회적 편익’으로 요약된다. 즉 자율주행차가 자동차를 대체하게 될 때 가지는 보편적이고 공공적인 이익이 그 비용에 비해 상당하다는 것이다. 4가지 범주로 정리될 수 있는 그 이익은 다음과 같다.


  1. 안전: 사고의 예방 및 회피, 사고 발생 시 생명 및 재산 피해 최소화

  2. 효율: 연료 효율 향상, 도로 이용률 제고, 차량 가동률 향상

  3. 환경: 친환경 운전, 점유공간 축소

  4. 편의: 이동 중 스트레스 저감, 이동 중 시간 활용, 각종 관리 부담 해소


각각에 대한 구체적 논의는 후일 해보겠지만, 일단 충분한 기술 검증을 거친 로봇이 탑승자 요구와 안전의 충족에 필요한 모든 정보와 조작능력을 가지고 운전한다고 가정하면, 각각의 자율주행차가 위의 가치를 실현하리라는 기대는 합당해 보인다. 밀리세컨드, 센티미터 단위로 제어될 자율주행차의 바퀴와 계기바늘은 낭비 없는 곡선을 그리며 다닐 것이다. 필요하다면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나 보던 운전을 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차들로 이루어진 근미래 교통은 지금보다 안전하고 효율적이며 친환경적이고 편리할 것이라는 설명이다.


97km/h의 속도에서 정확히 13m 간격을 유지하는 트레일러들은 전자적으로 동시에 브레이크를 밟으며, 끼어드는 차량을 만나면 자동으로 안전거리를 확보한다.


그런데 이런 생각에는 몇 가지 합리적이지 않은 가정이 포함되어 있다. 앞으로 세세하게 따져볼 내용들이라 요지만 꼽자면 다음과 같다. 무엇보다, 개별적 이익의 합이 전체적, 사회적 이익이 될 것이라는 원시적 공리주의 내지 산수적 접근이 깔려 있다. 또한 이 기대들은 미래 교통을 둘러싼 상황, 즉 자율주행차가 다니는 사회 속에서 사람들의 행동패턴과 도시의 물리적 구조 같은 것들이 지금과 별 차이가 없을 것이라는 ‘business as usual’ 가정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 가정과 연관된 것이지만, 미래 교통에 대해 선택 가능한 다른 방향의 길과 비교하거나 함께 고려한 결과가 아니다.

한편, 자율주행 개발세력 중 누군가는 위에서 거론된 이익이 자율주행 체제에 자연스레 따라올 것이라고 말한 적은 없다고 반박할 것이다. 그들은 교통수단의 궁극적 덕목에 해당하는 이들 가치의 구현을 목표로 혁신하는 과정 가운데 자율주행이 자연스럽게 대안으로 부상한 것이며, 그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또다른 혁신의 노력을 경주할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런 설명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그런 프레이밍을 가져온다 하더라도 나의 지적은 여전히 유효한 것 같다.

왜냐하면 앞에서 거듭 강조하였듯, 교통은 기술이나 기계의 총합으로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교통은 기계에 대한 것인 만큼이나 기반시설에 대한 것이며, 토지이용에 대한 것이며, 경제에 대한 것이며, 문화와 욕망에 대한 것이며, 기후변화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들을 단일한 틀에 넣고 설명할 의무나 권한이나 능력은 누구에게도 없다. 이런 맥락에서, 소수의 기업들이 자율주행 체제의 모델을 논하며 미래 사회의 교통을 책임지는 것처럼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착각이거나 월권이다. 보다 섬뜩한 음모론을 논외로 하면 말이다.


자동차의 개발이나 상용화에 관여한 누구도 이런 모습을 상상하거나 바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누구의 탓이며 무엇의 결과인가?

Aerial View of Suburban Housing Project | by Margaret Bourke-White / LIFE


자율주행과 미래 교통을 도시문제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우리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바를 도시적 차원에서 논의하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는 기업들이 근미래 자율주행 체제의 바람직한 모델을 논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한정된 지분을 가진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지분 구성을 확인하고 상기시켜주기 위해 필요한 관점이 바로 도시문제의 관점이다.

여기서 도시문제란, 도시문제의 관점이란 무엇인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무한히 어려운 질문일 수 있고 이 연재에서도 앞으로 계속 다듬어 가야 할 개념지만, 일단 나는 여기서 이렇게 정리해두고자 한다. 전세계 인구 과반수가 도시에 살며 1차 에너지의 3/4을 소비하는 지구에서 도시문제란 사실상 인류문제와 다름없다. 중요한 것은 도시문제가 사실상 모든 문제를 포괄한다는 점이 아니라, 사실상 모든 문제들이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는 점이다. 보고자 하는 자에게 도시공간은 그 민낯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도시문제의 장은 언제나 각자의 영역과 우선순위를 놓고 이해관계자들이 달려드는 악다구니판이다. 그 악다구니판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서로가 서로의 지분을 인정하는 한 어쩔 수 없다.** 이러한 상호 관련성과 투쟁적인 역동성 자체를 도시현상으로 인정하고 그 구조와 변화를 이해하려는 시도가 도시문제의 관점일 것이다.


도시문제의 관점에서 자율주행 체제로의 이행은 복잡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많은 학자들이 ‘중독’이라고까지 진단 내린 미국인의 자동차 애착은 그 애정에 딸린 까다로운 조건들 — 도시고속도로, 교외 개발, 화석연료 수급 기반, 주차공간 법규 등 — 과 함께 전세계에 수출되었다. 사실 미국인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자동차가 어떤 존재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자동차는 매력적이면서도 고약했다. 어느새 자동차는 마치 오래된 배우자처럼 미우나 좋으나 함께 살아야만 하는 존재, 익숙함과 종속성이 구분되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 후회(?)와 대안 모색이 시작된 지도 수십 년 지났지만, 몇몇 예외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은 그 애증관계에 완고하게 묶여 있다. 사실 우리 중 누군가, 도시문제를 고민해 온 사람들은 심지어 다시 나홀로 산다면 어떤 모습일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오랫동안 생각했고, 실제 그에 따라 시도도 해 왔다.

그러던 중 우리는 뜻밖에 (누군가의 도움으로) ‘새로운 배우자’를 만날 기회를 얻은 것이다. 다만 새로운 배우자의 취향과 요구조건이 무엇인지, 그동안 쌓인 우리의 불만 해소에 부합하는지는 정확히 모르고 있다. 그런데 다행히 그 고마운 누군가가 아직 새로운 배우자의 스펙을 확정하지 않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자, 우리는 그에게 어떤 요구를 하고, 한편 스스로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생각할수록 왠지 모를 기대와 불안, 흥분과 초조함이 한꺼번에 밀려오지 않는가?


경망스런 비유일지 모르나, 계속 강조하듯 도시의 교통은 구석구석 우리 삶의 문제다. 나는 미래 교통과 도시문제에 대한 앞으로의 글들을 통해, 이러한 기대와 불안, 흥분과 초조함을, 우리의 주인됨을 되찾기 위한 동력으로 전환하고자 한다.

지금까지 현대인의 삶의 구조 속 자동차의 영향력과 자율주행 시대 진입의 의미, 그리고 이 순간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느끼는 비판의식을 언급하면서, 그 렌즈로 도시문제의 관점이 갖는 가치를 주마간산 격으로 묘사해 보았다. 도시문제의 관점에서 자율주행이라는 이슈가 대략 이런 구도라고 할 때, 자율주행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는 역시 자동차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서사에서 출발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대체 자동차의 잘잘못이 무엇인지, 우리의 잘못이나 오해는 없었는지, 어떤 교훈이 남는지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 그리고 우리의 요구와 태도를 분명히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앞으로의 50년 또는 100년 동안 우리가 도시의, 지구의 주인으로 살아가려면.


앞으로 몇 편에 걸쳐 자동차의 시대 여명기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 시기를 누구보다 흥미진진하게 자신의 드라마로 만든 Carl G. Fisher라는 인물을 살펴보는 것으로 다음 이야기를 시작할 참이다.


* 새로운 상황에는 모든 네트워킹된 사회와 조직이 겪는 개인정보 문제나 사이버 테러와 같은 리스크도 포함된다. 이것에 대해서도 별도로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 증기기관으로 촉발된 산업혁명과 교통혁명은 도시공간에 인간의 적응 역량을 넘어서는 유동성과 변화를 가져왔다. 그로 인해 수백 년간 유지되어 오던 도시의 동적 평형이 갑자기 무너졌고, 새로운 평형을 찾는 과정에서 자신의 지분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한 계층은 19세기 도시에서 극한 생활환경을 겪어야만 했다. 지난 200년 가까운 기간 사회과학 발전의 상당 부분은 도시민의 인간으로서의 정당한 지분과 협상력을 놓고 벌인 논쟁의 산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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